화요일, 5월 27, 2008

일이 잘못되어 가는 과정

예전에 순진했던 그 옛날 시절에는 정말로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믿었더랬다. 차차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뭐, 별다른건 아니고 그놈의 '정(正)' 에서 올바르다는 의미가 뭔지가 참 애매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인간으로써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말의 앞뒤가 맞다/맞지 않다 정도만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이러한 옳다는 것에 대해 너무 믿음을 깊게 갖지 않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큰 사업은, 사실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어디로 갈지 예측하기가 무지 어렵다. 이번에 진행중인 사업도 큰 사업이다. 사업 자체에 거대 음모나 비리가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추진 중인 진행자들도 각각을 놓고 봤을때는 그다지 큰 문제점을 찾을 수 없다. 즉, 각각의 단위 주체들은 각 주체들 나름대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나오는 결과로만 보았을 때는 최선의 결과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일단 발주처를 보자면, 틀림없이 그들은 돈이 있다. (민자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10년간 할부금을 대줄 돈은 있는 거다) 그리고 요구사항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은 지식과 경험이 별로 없다. 사실 이건 당연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식이 없으니 돈으로 사려고하는게 아닌가? 당연하긴 하지만 크나큰 문제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자기네들의 요구사항을 명확히 기술할 수가 없는게 모든 스토리의 시작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발주처의 지식이 얕으므로 이 기본설계를 용역을 통해 완료했다. 당연한 일이긴 하다. 용역업체는 발주처의 요구사항을 가지고 기본설계를 마련했지만 어디까지나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업체의 욕심이 잔뜩 들어간 기본설계가 나왔다.

발주처는 지식이 없다뿐이지 업체의 욕심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모를리 없다. 다만 어느 부분인지를 모를 뿐이다. 결론은 늘 그렇듯 당연하게 제안요청서(RFP)를 더욱더 모호하게 적는 방법을 택한 후 모든 것을 제안서를 평가할 때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큰 사업은 당연히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 따라서 공고에서부터 시작해서 벤치마크, 제안서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 룰에 따라 벤치마크는 (거의)기계적으로 돌리고 제안서 평가는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풀에서 평가자를 랜덤하게 뽑아서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사업을 잘 모르는 (쉽게 말해 이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고 사업에 대한 절실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단지 자신의 기준 (여기서는 대부분 교수...급들)에 의해 평가가 될 것이 뻔하다. 이것도 '공정한' 평가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무지무지 당연하지만 앞서 틀어지기 시작한 비틀림 -- 요구사항의 불명확성 -- 때문에 모든 결과는 알 수 없게 돼 버린다.

다음으로 확실히 대못을 박아버린 계기는 바로 민자사업이기 때문에 관례상 해온 제안 형식 때문이다. VE(Value Engineering)이라는 제안형식인데, 이 형식은 이론적으로는 그럴듯 하다. 기본설계를 바탕으로 보다 더 나은 제안을 할 수 있으면 하되, 그 효과는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말이 쉽지 실제 VE 제안서란 놈을 본 사람은 그 제안서란 것이 녹녹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일단 기본설계가 완벽해서 그냥 그 설계대로 진행을 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기본설계는 단지 희망사항일 뿐인 IT업계에서는 제안서 제작 자체를 막막하게 하는 것 외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모호한 요구사항, 부실하고 욕심이 들어간 기본설계, 헷갈리는 제안 양식, 뭘 평가할지 모를 평가위원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싸악 제거하고 그 동안 제안서 쓰려고 익혀뒀던 발주처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같은 예산이면 무지무지 좋은 환경을 구축해 줄 수 있다. 다만... 그러려면 그저 해당 RFP의 요구사항 몇 개를 살짝 무시하고 RFP에는 없는 다른 기능을 가진 서비스를 제공해 줘야만 한다...

나의 선택은 당근 이러한 망상을 제거하고 어디까지나 채점하기 귀찮아할 평가위원들을 위해 깔끔하게 정리된 제안서에 RFP요구사항에 나온 것만을 만족시키는 맘에 안드는 시스템을 소개하는 것이다.

뭐, 생각같아서야 발주처에 대략 말 통하는 사람 붙잡고 너네들 요구사항은 이러한 것보담은 요로코롬 만드는게 더 좋을 듯 한데 어떻겠냐고 하소연을 하고 싶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더 답답하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개개인이 잘 못하는 것 같지 않는데 일은 잘못되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암담할 뿐...